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카모리 아키나 (문단 편집) ==== 자살 미수 사건 ==== 1989년 7월 11일, [[도쿄]] [[미나토구(도쿄)|미나토구]] [[롯폰기]]에 있는 [[콘도 마사히코]]의 맨션에서 [[자살]]을 시도하는 사건이 벌어졌다. 쓰러져 있는 아키나를 발견한 콘도의 신고로 병원으로 이송된 아키나는 절단된 혈관과 신경을 봉합하는 6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.[* 팔꿈치 안쪽을 너무 깊게 긋는 바람에 왼손 약지의 신경 손상으로 움직임이 지금도 부자연스럽다고 한다.] '''[[마츠다 세이코]]와 콘도 마사히코의 뉴욕 밀회 스캔들'''[* 1989년 2월, 일본인들이 많이 이용하지 않는 에어 프랑스 호텔에서 2, 3일에 걸쳐 이틀간 세이코와 콘도가 '''하룻밤'''을 보낸 것이 'FRIDAY'와 여성 주간지 '미소'에 의해 포착되었다. 이 사건을 기점으로 아키나는 몸무게가 36kg까지 줄었고, 1986년 집시퀸 시절부터 '''3년 내내 착용하던 아키나의 왼손 약지에서 콘도가 준 반지도 사라졌다'''.], 콘도와의 성격차이[* 아키나는 일찍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싶어했고, 콘도는 서른살이 넘어 결혼하고 싶어했다고 한다. 콘도는 선배 가수 사이죠 히데키에게 "아키나짱은 결혼할 여자는 아니야"라고 밝힌바가 있으며 아키나와는 애초부터 결혼할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. 그러나 콘도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힘들어했을 때, 아키나가 옆에서 위로해 준 것이 큰 힘이 된 것으로 보인다. 그런데 정작 콘도는 아키나가 가족문제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, 방관자로 돌아갔다. 콘도가 본인 에세이에서 인정한 사실이다.], 가족간의 금전적인[* 가족들은 아키나가 연예계에 데뷔하여 성공하게 되자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아키나가 벌어온 돈을 쓰며 호화생활을 했고, 아키나 혼자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.] 문제로 인한 분쟁과 연예생활을 하는 동안 깊이 곪아온 감정적인 문제까지 겹쳐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.[* 아키나의 자살미수 원인이 가족과 회사보다 콘도와의 문제에 더 무게를 실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, 우선 아키나의 가족들은 본디 망나니였으며, 뉴욕 스캔들 이후 아키나의 체중이 36kg까지 감소한 것, 손에서 콘도가 준 반지가 사라진 것, 콘도의 방에서 자살 기도를 한 것, 95년 아키나의 인터뷰에서 "결혼이라든가 진지한 내용이 오고 간 상대가 있었다면 저렇게 되지 않고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지만"이라고 언급한 것,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모든 원인은 콘도이며, 아키나가 콘도에게 너무 집착해서 자살 소동까지 간 것이라 추측해 본다.] 이 시기의 아키나는 콘도와 다툼이 일어나면 곧 쓰러져서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. 이 때 큰 건을 물었다 싶었는지 대부분의 [[황색언론]] 잡지들은 아키나의 자살 미수에 수해서도 자극적으로 다루었다. 큰 제목으로 <인기가수 아키나, 콘도의 집에서 자살>이라 쓰고 밑에 "시도했다"를 아주 조그만한 글씨로 써놔서 여러 사람들이 충격과 오해를 가지게 되었다. 사건 이후 연말인 12월 31일에 [[https://youtu.be/7Inwg-uY46g|사죄 기자회견을 열어]] 콘도 마사히코와 함께 참여했는데, 이 자리에서 아키나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"연예 활동을 지속하면서도 불미스러운 일로 걱정을 끼친것에 깊이 사죄드린다.라고 말하면서 대국민 사과를 했다.[* 자살 미수 사건의 원인과 배경을 봤을 때 아키나는 피해자에 가까움에도 일본은 당시만 해도 매우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아키나가 사죄 기자회견을 한 것이다. 또한, 이 사죄 기자회견의 배경에는 당시 아키나의 소속사인 켄온이 그렇게 규모있는 기획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콘도의 소속사이자 거대 기업인 쟈니스로부터 아키나를 지켜줄 바람막이가 없었던 것도 한 몫 했다.] 같은 시간에 NHK에선 제40회 [[홍백가합전]]이 방송 중이었는데, 기자회견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바람에 이 해의 홍백가합전은 처음으로 30%대로 추락하며 역대 최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. 이 기자회견은 일본에서 큰 화제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금색 병풍 기자회견(金屏風前会見) 사건으로 불린다. 이 때 기자들은 콘도에게 다음해인 1990년 쯤에 결혼이나 약혼을 할 계획이 있냐고 묻자 콘도는 결혼 계획은 절대 없다.고 딱 잘라 말했고, 아키나와 콘도의 관계는 이 기자회견을 끝으로 완전히 종결점을 찍었다.[* 자살미수 사건이 일어나고 몇 달 뒤 두 사람은 이미 결별했었고, 기자회견에 두 사람이 참석한 것은 아키나가 콘도에게 부탁해서라고 한다. 콘도는 기자회견에서 아키나가 안정을 취할 때까지 지원을 해주겠다는 말을 했는데, 그 연유로 이듬해 아키나의 생일 파티에 축하를 하러 가기도 했다.] 하지만 일간에서는 1994년, 콘도가 결혼하기 직전까지도 아키나가 그를 잊지 못했다고 전해진다.[* 다시 이어질 가망이 없다는걸 알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그를 그리워했다고 한다.] 이후 아키나는 몇 달 간 방황하며 활동을 쉬게 된다. 아키나의 공식적인 자살미수 사건은 1989년 7월 11일로 알려져 있지만, 사실 그전에도 두 번의 자살미수 사건이 있었다. >자살 소동은 처음이 아니었다. 여태까지 두 번 정도 아키나는 자살을 시도했다. >'''첫 번째는 85년 4월, 아키나는 규정량 이상의 수면제를 먹었다.''' >'''이어 반년 뒤인 85년 10월, 충동적으로 손목을 면도칼로 그었다.''' >---- > 전 켄온 사장 하나미 아키라의 인터뷰, 주간 포스트 (2013.10.11호) [[https://an-fun-site.at.webry.info/202007/article_3.html|#]] 아키나가 소속되어 있던 [[켄온]]의 사장 하나미 아키라는 아키나의 자살 미수는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에, 1989년 7월 당시 "또야?"하며 당황하지 않고 병원으로 향했더니, 이미 메리 키타가와(당시 쟈니스 대표이사)가 있었다고.. 훗날 아키나는 이 사건을 이렇게 회고했다. >가족을 위해 17살 때부터 일하기 시작했어요. >5년 전 그 소동[* 89년 자살미수.] 때도 가족은 내 마음 같은 건 결국 전혀 알아주지 않았고, 사무실이 하는 말은 믿어도 저를 믿어 주지는 않았어요. >가족은 남이 아니니까 더욱 곤란해지네요. 예를 들어 연애라면 고작 연애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타이르잖아요. >상대는 어차피 남인데 어쩔 수 없잖아, 그렇게 딱 잘라버리겠죠. >하지만 피가 연결되어 있으면 아무리 알아주지 않아도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거죠. >옛날에 다른 가족들도 아버지에게 가게를 내 주었어요. >근데 자기가 고생해서 낸 가게가 아니라서 금방 망하게 되거나, 열심히 하지 않아요. >그 후로도 4년이나 5년이나 일을 하지 않고, 무엇인가 조금 하다가 금방 그만둬 버려요. >그런 걸 보면 내가 가수가 된 게 잘못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.. >그러면서도 가족들은 나 몰래 사무실에서 매달 돈을 받곤 했어요. 이상한 얘기지만 사무실과 가족은 점점 유대감이 강해지는데 저와 가족관계는 멀어져만 갔습니다. 5년전 그때는, 내가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? 그런 절망감으로 가득 차서... >회사도 가족도, '''어쨌든 인간을 모두 믿을 수 없게 되었어요.''' >내가 열심히 해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? 라고 생각했을 때에는, 이미 솔직히 연애에 집중할 상황이 아니었어요. >'''결혼이라든가 진지한 내용이 오고간 상대가 있었다면 저렇게 되지 않고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지만, 나는 벌써 외톨이였어요.''' >'''그래서 죽으려고 했던 것도 할 수 있었을 거고.''' 콘도씨에 관해서 저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어요. >콘도씨에게는 소동에 휘말려 큰 폐를 끼쳐서 미안했다는 생각 뿐이었어요. 그래서 몇 달 후에 그와는 헤어졌어요. >지금 제 마음속에는 꼬리를 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. >---- > 마르코폴로 95년 1월호. 나카모리 아키나 격백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